국문학도답게 고전 시가, 현대 시 한 편씩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 뉴스를 보면서 왕과 신하의 관계가 생각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信義)를 잊은 왕에 대한 원망을 노래한 향가를 소개합니다.
원 가 (怨歌) - 신충 -
物叱乎支栢史 믈횟 자시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가살 안달 이우리 디매
汝於多支行齊敎因隱 너 엇뎨 니저 이신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울웠던 나치 겨샤온대
月羅理影支古理因潤之叱 달그림제 녯 모샛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녈 물결 애와티닷
貌史沙叱望阿乃 즛사 바라나
世理都 之叱逸烏隱第也 누리도 아쳐론 뎨여
[ 현대어 풀이 ]
뜰의 잣나무는(질 좋은 잣이)
가을에도 시들어 떨어지지 아니하매
너를 어찌 잊겠느냐 말씀하시어(너를 중히 여겨 가겠다 하신 것과는 달리)
그 인격을 우러러 보았더니, 이제 당신의 변심이여(낯이 변해 버리신 겨울이여)
그것은 연못에 비친 달그림자가(달이 그림자 내린 연못가에)
물결이 일면 사라져 버리듯(지나가는 물결에 모래로다)
하찮은 일에 변모함이니(모습이야 바라보지만),
세상이 모두 그런 때로구나(세상 모든 것 여의어 버린 처지여).
[ 감상평 ]
변심한 왕의 마음을 원망하는 향가이지만, 잣나무의 영원한 푸르름에 반하여 인간 마음의 변덕스러운 변화를 질타하는 내용도 아울러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너무나 변하기 쉬운 상황 속에서의 인간이기에, 때론 서로의 믿음이 깨어져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신충의 마음을 담은 시가 잣나무를 시들게 했다는 것은 표현의 과장이겠지만, 신충이 그만큼 굳은 신의를 중요시 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신의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태목님께 출석부를 올려달라는 연락을 받고 이후 카톡을 하면서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다음으로는 제 아버지와 시민광장에 계신 아버지들께 바치는 시 한 편 입니다.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감상평 ]
이 시는 평범한 시어와 쉬운 어조로 가족을 위해 말없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림으로써 잔잔한 감동을 전해 줍니다. 이 시에서 묘사된 아버지의 모습이 물론 모든 아버지의 경우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다수 아버지가 지닌, 혹은 지향하는 보편적인 부성의 모습을 이 시만큼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도 드물 것입니다. 물론 이 시에서 그려진 아버지의 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상을 그리고 있다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모습만이 그려지고 있을 뿐 살아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배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의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진 채 묵묵히 가족들의 울타리가 되고 자식들의 버팀목이 되는 많은 아버지의 모습이 이 시에처럼 선명한 형상을 얻고 있는 예를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집과 같이 거룩한 존재입니다. 집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곳에 주소를 두고, 이름을 적을 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이루어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집은 언제나 한 곳에 우뚝 서서 자리를 지킨 채 말이 없습니다. 집이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아버지도 항상 말없이 사랑과 근심으로 자식들을 돌보고 앞날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식구들을 위한 매일의 수고와 삶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풀어야 하는 외로움으로 인해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겉으로는 태연해하거나 자신만만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무감과 자식들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존재입니다.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권위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가장으로서 모든 가족의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아버지는 잠시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힘겨운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속으로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깊은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 곧 자식들의 올곧은 성장과 순수뿐입니다. 비록 세파에 시달리며 힘든 삶을 사는 아버지이지만, 자신의 소망대로 자식들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자라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 모든 고독과 노고를 깨끗이 보상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운이 남는 출석부가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