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8월 21일에는 제가 명배우 주연 연극 ‘노숙의 시’를 함께 관람하자고 선동하는 출석부를 올릴 예정입니다. 출석부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명배우 관련 제가 쓴 세 편의 글을 우리 시민광장 게시판과 노무현재단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8월 21일 프레출석부인 셈입니다.
//////
나이 서른 즈음에 배우 명계남은 많은 청춘들에게 우상이었다. 선무당 작가 시절, 희곡을 쓴답시고 대학로를 기웃거리다가 모노극 <콘트라베이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혼신의 열정으로 두 시간이 넘는 모노극을 펼치던 그의 모습은 연극이 끝나고 콘트라베이스의 내용보다는 그가 흘린 땀과 열정이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에는 근접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명배우였다.나는 호시탐탐 그의 동정을 살폈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mbc-tv에서 <고향길 문화기행>이라는 다큐 프로그램을 편성했는데 내게 한달에 두편의 작품이 할당 되었다.6개월 동안 12명의 명사들과 함께 고향에 가서 일주일 동안 생활해가며 프로그램을 만들고 방송 하는 것이다.나는 PD와 의논해서 이철,안숙선,전상국,민용태,이현세,명계남을 출연 대상으로 하고 연락을 취했다.
"명선생님 고향이 어디세요?"
"어, 나는 개성이야. 이북이라 갈 수 없잖아"
첫 통화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아무리 생각해도 시청율을 위해서도 출연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동료 작가에게서 지혜가 나왔다.
'젖먹이 갓난아기 1.4 후퇴 때 남으로 내려왔다는데 내려와서 정착한 곳이 고향 아니겠어?'
나는 교양제작국과 편성국에 <고향>의 의미를 설득하고 마침내 기회를 살려냈다. 그런데 일정상 당시 제작하고 있던 영화 <초록물고기>가 발목을 잡았다.영화에서 명선생의 출연 비중이 높아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명선생과 출연 합의는 해 놓고도 시간을 못 내서 제작을 못하게 되는 상황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12명중에 벌써 7명의 제작과 방송이 진행 되었고, 방송이 나가다보니 여기저기서 출연 요청도 들어오던 때라 차츰 아쉬운 생각이 들 때였다.그러던 11월 초, 시간을 낼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곧바로 공주로 내려갔다. 공산성, 신라 사진관, 갑사, 곰나루터...... 일주일 동안 공주 어는 한 곳에 숙소를 정해 두고 그렇게 <고향길 문화기행-명계남 편>은 제작 방송 되었다.
백제시대 토성인 공산성의 이불만한 낙엽, 갑사 입구 좌판을 펼친 아낙들의 군밤, 갑사 달마스님과 땄던 홍시. 민속학자 심우송선생과 민속 박물관,공주박물관....... 이창동 감독, 문성근 대표와의 인연도 명선생 때문이었다. 이 분들이 훗날 유시민대표와 함께 한국사에 위대한 자취를 남긴건 다들 아시리라.
세월이 근 이십여년이 흘렀다. 그동안 명선생은 노사모를 만들고, 개혁당, 열린우리당 전해지는 소식은 정치인에 대한 이아기들이었다.나는 작가 생활도 접고, 나 살기 위한 이기심 때문에 더 이상 연락을 하거나 어느 모임에서 만나지도 않았다.
(‘천암함랩소디’와 명계남,2013년 10월 시민광장 회원게시판)
그가 젊은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무대에만 서면 신명이 난다. 최선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명배우임에 틀림없다. 이런 명배우에게 연극이 끝나고 기껏 물어보는 나의 질문이라는 것이 ‘명선생님 부숴진 불상은 스치로폴로 만들어서 가벼운거죠? 테이프로 뗏다 붙였다 하는거죠?’ 좌중은 뭐 이런 사람있나 싶겠지만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말이다. 그런데 나보다 한 수 더 뜬 사람은 ‘무대 전환 할 때는 조명도 다 꺼지고 깜깜한데 그 때는 소품을 어떻게 나르고, 배우들은 어떻게 자리를 그렇게 잘 찾아 간데요?’ 이렇게 물어본다. 이럴 때는 나도 한마디 거든다.. ‘허, 이 사람 물어 볼걸 물어봐야지. 극 내용을 갖고 물어보면 격이라도 있어 보이는데 이런 걸 물어보면 어쩌나?’ 그리고는 ‘명선생님 진짜 어떻게 하는 거예요?’
(목탁속의 작은 어둠, 일체유심조 이야기, 2014년 10월 시민광장 회원게시판)
진실 혹은 거짓말, ‘알프스의 황혼’과 명계남
알프스산에서 산새소리 흉내를 내며 사는 흉내쟁이 70대 맹인 남자(명계남 분)의 이야기다. 맹인은 20대 중반에 남태평양 어느 섬에서 진행된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 구름 버섯을 똑바로 보다가 시력을 잃었다고도 하고, 나찌 군인으로 참전해 다이너마이트같은 폭발물을 다루다가 실명했다고도 한다. 어느 말이 맞는지 몰라도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망막색소변소증을 앓으며 시력을 잃었고, 알프스산 맑은 공기와 함께 지내면 눈이 더 나빠질 것 같지 않다고 해서 이 곳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50년을 알프스산에서 살아왔고, 산 아래 세상 소식은 건전지 낀 라디오와 산장 직원(안윤철 분)이 앵무새처럼 들려 주는 ‘세상은 평화롭고 사람들은 생업에 열심’이라는 소식이다.

지독히 외롭고 고독한 노인이지만 그에게도 로미오같은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고, 줄리엣을 만나고 싶어한다. 노인은 맹인협회에 자신을 돌봐주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여자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쓴다. 줄리엣같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쓴 모양이다. 그리고 ‘야스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김소희 분)가 알프스산 노인의 처소에 찾아온다. 그녀는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줄리엣의 모습이 아닌 창녀의 모습으로 노인에게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투리니의 원작 ‘알프스의 황혼’ 한국 초연
맹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맹인이 되기 전에는 리더스다이제스트와 고전문학을 열심히 읽었고, 대학에서는 신문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의 신문방송학이라는 얘기를 반복한다. 자신이 극 연출가라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는 것이며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관객이 판단할 몫이다. 지금은 지독히 외롭고 고독한 노인, 알프스산에서 새소리 흉내를 내며 생계를 잇고 사는, 그러나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맹인이다.
야스민의 정체는 무엇인가. 극 속의 야스민은 창녀이기도 하고, 줄리엣 연기를 오랫동안해온 배우이거나 줄리엣 연기를 하고 싶어하는 배우지망생이다. 한동안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맹인협회 직원으로 근무 하면서 맹인의 편지를 받고, 맹인과 같은 사랑을 하고 싶어 알프스산을 찾아왔다고 한다. 맹인을 찾아올 때 그녀는 창녀였다. 70대 맹인과 50대 야스민, 두남녀의 현실 혹은 상상, 진실 혹은 거짓말 게임이 연극 <황혼>(원제 Alpengluehen, 원작 페터 투리니)이다.
맹인의 처소는 알프스산이 훤히 보이는 양지바른 곳이다. 발코니가 있고, 창문을 통해 맑은 햇살이 들어온다. 이런 발코니와 창문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공간이기도 하다. 관객들에게 낯설지 않다. 이 창문을 통해 맹인은 일정하게 약속된 시간이 되면 알프스산 관광객들에게 새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노인의 방에는 침대가 놓여져 있고 침대 뒤에는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소파가 있다. 벽 한 면에는 거울이 걸려있고, 맹인이 야스민에게 ‘거울을 보면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말해 줄 수 있겠소’라고 말 하는 것으로 보아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에게 이 거울은 특별한 상징물이다. 맹인은 매일 이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을테고, 무엇이든 무한히 상상했을 것이다. 거울 옆에 세면대가 있다. 극은 이렇게 구성된 무대 하나의 공간, 맹인의 처소에서만 이루어진다. 무대가 이렇게 간결하다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극 흐름이 배우의 대사 중심이라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거짓말들 속에 감춰진 ‘고독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
원작자인 페터 투리니는 오스트리아 작가로서 실험적 언어 구사 능력이 빼어난 작가로 알려져있다. 실존과 초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간다는 것은 실존 존재의 본능과 초현실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가공의 언어가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극은 맹인역의 명계남과 야스민역의 김소희, 이 두 배우에 의해 대사 위주로 전개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잠시라도 졸거나 다른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그야말로 온 신경을 집중해서 두 배우의 입을 바라보아야 하는 긴박한 호흡으로 대사가 전개된다.
맹인: 색깔이 있는 콘돔도 있소?
야스민: 네 있어요
야스민은 맹인의 열 손가락에 파랑 노랑 초록 등 색색 콘돔을 끼워준다. 성적 욕망의 상징인 콘돔이 맹인의 상상에 의해 자연의 색, 아름다운 인간 본능이 발현되는 대사다.
야스민: 이름 그 까짓게 뭐 중요해요.
야스민의 대사다. 자신이 50을 살면서 그 때마다 역할에 맞는 이름을 가져 보았지만 다 허사이고, 정작 자기 자신 본연에 충실하라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한다. 야스민은 줄리엣 역의 배우가 되기위해 노력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배우가 되지 못했고, 비현실 속에서 배우가 되고 줄리엣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찾는 로미오가 있다고 믿고 이 곳 알프스산에 온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야스민 앞에는 로미오를 대신한 맹인이 있을 뿐이다. 이 둘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이다.
명배우 명계남, 연희단거리패 대표겸 배우 김소희의 ‘메소드 연기’
맹인과 야스민, 두 배우의 대사는 현실과 비현실 속에서 진실 혹은 거짓말로 나선형처럼 베베 꼬아 올라간다. 정과 반이 충돌 하면서 합을 이루어간다. 관객은 두 배우의 대사에 몰입되어 어느 것이 진실인지 진실을 찾으려한다. 진실만을 골라 들으려한다. 그러나 뭐지? 뭐지? 하다가 이윽고 정점에 이르러서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 묻혀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걸 깨달을 즈음 이젠 현실이다. 야스민은 짐을 싸고, 알프스산 젊은 직원과 함께 맹인의 곁을 떠난다. 이렇게 연극 ‘황혼’은 아스라한 알프스산의 고요와 정적을 뒤로하고 막을 내린다.
연극 황혼은 우리나라에서는 초연이다. 초연인만큼 그 표현이 매우 어려웠을텐데 채윤일 연출이라서 가능했고, 명배우 명계남, 연희단거리패 대표이면서 배우인 김소희여서 가능했던 연극을 한 편 보았다. 노무현재단 회원들과 함께 조촐하게 나선 대학로 나들이였는데, 막상 연극이 끝나고는 뭉클하게 전해져 오는 메시지가 있어서 마음 무거운 밤이 되고 말았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조진광 팀장 얘기를 들으니 재단 행사에 예약하고서 신청자가 백프로 참여한 행사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필자가 예약을 안 한 사람을 더 데리고 간 탓에 조 팀장은 무대 앞 바닥에 보조석을 깔고 앉아 관람하게 했는데, 연극이 좋았던 탓에 별로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명계남 선생의 중후한 멋과 특유의 익살스러움이 더욱 빛났던 연극 <황혼>, 12월 4일까지 공연이라는데 많은 분들이 함께 보았으면 한다.
글쓴이는 20년전 모노극 '콘트라베이스'를 관람하면서 명배우와 인연을 맺었다. MBC ‘고향길 문화기행’ 방송 작가 시절 명배우와 함께 공주에서 일주일을 같이 지내면서 명계남 편을 방송했다. 노무현 대통령 추모헌정곡 ‘그가 그립다(조관우 노래)’를 작사하기도 했다. 노무현재단 후원회원이며, 극작가, 성북문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알프스의 황혼’ 2016년 11월, 사람사는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