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전태일
2008.11.13ㅣ정윤수의 BOOK...ing 365
지난 월요일 저녁, 호서대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김교빈 선생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의 실학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 그들의 계보와 의의를 유려하게 풀어낸 그날 밤 강의에서 내 귀에 쏙 들어온 것은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에 대한 설명보다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하는 대목이었다.
참고로, 한국 철학을 포함한 동양철학의 거의 모든 것에 관하여 매우 친절하면서도 깊이 있는 강좌를 듣기 원한다면 김교빈 선생께 부탁하기를 권한다. 김교빈 선생은, 청탁 불문, 그러니까 멀거나 가깝거나 소수이거나 다수이거나 일반 시민이거나 단체이거나 상관없이 그들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지 않는다. 편안하게 앉아 있었을 뿐인데, 당대의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유가 섬세하게 그린 풍경화처럼 눈에 들어온다. 원래 호서대 '철학과' 교수였는데, 이 과의 이름이 '문화기획학과'로 바뀌었다. 최근 인문학의 어떤 처지를 말해주는 씁쓸한 풍경이기도 하다.
아무튼 월요일 저녁도 대중적인 시간이었기 때문에, 김교빈 선생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쉽게 설명하고자 했다. 잠시 그것을 옮기면 우선 김교빈 선생은 인간이란 '3일을 굶으면 담장을 넘는' 그런 존재임을 설명했다. 물론 이 말 한 마디 한 것은 아니고 물질 세계와 인간의 욕망에 대한 풀이가 이어졌다.
그 다음으로 덧붙인 것은, 그렇게 굶어 죽기 직전에 처한 인간에게 누군가 밥을 주면서, 정성껏 차리거나 그도 아니면 자기네들이 먹는 상에 숟가락 하나 더하여 같이 먹자고 하는 게 아니라, 먹다 남은 거 긁어 모아서 적선이라도 하듯이 내밀면 비록 사람이 3일을 굶었어도 '싫소, 나는 그거 먹지 않겠소' 하면서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택한다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억압적 현실이 비참한 상황을 강요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땅히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것이 진실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만드는 실천의식이라는 설명이었다.
오늘 11월 13일은 20세기 현대사에 결코 삭제할 수 없는 중요한 사건 두 가지가 발생한 날이다. 이 사건들을 말하기 앞서 김교빈 선생의 강의 몇 대목을 옮긴 것은, 이 두 가지 사건이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위대한 결행이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사건. 1955년 겨울, 12월 1일 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사는 중년 흑인여성 로사 파크스가 버스에 올라탔다. 그녀는 몹시 피곤했기 때문에 앞머리의 백인 전용석에 앉았다. 운전 기사가 "흑인은 뒤로 가라"고 요구했지만 로사 파크스는 일어서지 않았다. 피곤했던 까닭도 있었지만 피부색에 따른 앞뒤 자리 구분은 정말로 먹다 남은 거 긁어 모아서 누렁이 녀석에 던져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사 파크스 부인은 몽고메리시의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 전해에 '시설 분리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며 공립학교 내 인종분리를 금지시킨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난 적 있었기 때문에 곧 이 사건은 흑인들의 시내버스 전면 보이콧 시위로 확산되었다. 흑인들은 덱스터 애버뉴 침례교회 소속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대표자로 선출하여 장기적인 저항에 나섰다. 그 당시 킹 목사는 26살이었다. 버스 수입이 급격히 줄자 시는 킹 목사를 비롯한 주도적인 인물들을 제소하여 1심에서 유죄를 이끌어냈다. 킹 목사는 곧바로 항소를 하면서 법정투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1956년의 오늘, 11월 13일이 되었다. 몽고메리시 법원. 킹 목사와 흑인 및 이들을 성원하여 함께 저항에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긴장 속에서 재판에 임했다. 그런데 점심 무렵부터 재판정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원고 측의 경찰청장과 시장이 변호사와 함께 굳은 표정으로 법정 뒤로 빠져나가 밀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잠시 후 킹 목사는 충격과 감동의 소식을 듣게 된다. 미 연방대법원에서 '버스 안에서 흑백 좌석을 분리하여 앉도록 한 몽고메리시 조례 및 이 근거가 되는 앨라배마주 법률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1956년의 오늘 11월 13일의 이 사건은 60년대 미국 사회의 격렬한 혼란기를 거치면서 결국 오늘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두 번째 사건은 1970년의 오늘, 11월 13일에 일어났다. 11월 13일 이른 아침부터 서울 청계천의 평화시장에는 많은 수의 경비원과 경찰이 곳곳을 미리 선점하면서 삼엄한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긴장과 두려움과 일말의 기대가 뒤섞인 오전이 흐른 후, 오후 1시부터 수많은 골목과 가게가 밀집한 평화시장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수는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곧 노동자와 경찰 및 경비원들 사이의 실랑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의 오후 2시. 한 청년이 나타났다. 당시 나이 22살의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었다. 그는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근로기준법을 손에 움켜쥔 채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러면서 동시에 불을 당겼다. 불길에 휩싸인 채 전태일은 제 몸과 함께 그 당시로는 휴지만도 못한 근로기준법을 끌어안고 영원의 시간 속으로 걸어갔다.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회생 가망성은 없었다.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라는 유언과 함께 "배가 고프다" 는, 진실로 비참한 역사와 가망없는 인내와 뜨거운 격정의 순간들이 응축된, 그 한마디를 남기고 1970년의 오늘, 11월 13일 밤 10시 경에 숨을 거뒀다. 아들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또 다른 한 생애를 아름다운 저항의 길로 나섰음은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경제 형편이 나아졌고 그 당시에 22살 노동자 전태일이 원했던 '실정법'의 어떤 최소 범주는 많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변화는 물론이고 오히려 1997년의 IMF 사태와 그 이후의 왜곡된 시장주의의 전면화로 인하여 더 강화된 악법이 현존하고 그 때문에 오늘의 열악한 경제 형편에서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인 고통에 직면하고 있음은 두루 아는 바와 같다.
거시적이거나 미시적이거나, 이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인류를 위해서나 우리나라의 현실을 위해서 버락 오바마의 당선이 실질적인 '악의 축'이었던 조지 부시 시절보다 조금 낫기야 하겠지만 동북부 중공업(특히 자동차산업)에 기반을 둔 버락 오바마 시대가 우리의 경제 형편에 반드시 우호적인 역학 관계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천성이 게으르고 낮에는 번다한 일로 쏘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이 블로그나 더러 달리 부탁받은 원고들 때문에 밤을 새는 일이 많다. 그러다가 담배라도 떨어지면 작업실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가게 된다. 편의점에는 이제 갓 20살이 넘었을까 싶은 알바생이 있다.
아마도 그곳만이 아닐 것이다. 취객의 행패를 마지못해 거들어야 하는 심야의 주점에도 알바생들이 있다. 시급이 그리 넉넉지는 않을 것이다. 심야의 공기는 불안하기 일쑤다. 그밖의 물질 세계에서도 오직 생계를 위하여 제 육체의 고단함을 억지로 잊어야만 하는 형편들이 많을 것이다. 좀처럼 잊기 어려운 11월 1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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