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맑은, 가슴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아”
4월 9일과 10일 밤, 잠이 오지 않아 맑은 정신으로 새웠습니다.
시민광장 여러분이 올린 글을 읽었습니다. 출근시간에 매연 가득한 네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낙선인사를 열심히 하고 있는 동생 유시민의 모습을 동영상으로도 보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올챙이송이 귓가에 맴돌고, 동아백화점 앞을 가득 메운 채 축제마냥 율동을 함께 하던 여러분의 몸짓이 아직도 바로 눈 앞인 듯이 아른거립니다.
정녕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사무침’은 또한 무엇인지요! 우리들의 마음은 사무쳤으되 꽃을 피우지는 못하였습니다.
고마운 시민광장 여러분.
저는 마음 정처없어 이리저리 헤매이다가 서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시집을 뽑았습니다. 1940년대 시인들의 시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진군하는 일제 파시즘의 파죽지세 앞에서 조선의 문인들은 대략 친일행렬에 가담했지만 정지용 등 빼어난 시인들은 저항도 투항도 아닌 내면적 망명의 길을 택하고 모국어의 승화를 결행합니다.
그들은 밀실에서 무척 고통스럽게 살았던 반면, 이육사로 대표되는 일군의 시인들은 추락과 투옥의 고행을 선택해 자신들을 해방운동의 제단에 바칩니다.
그러나 절망적 현실에 대응하는 자세는 달랐지만 지용과 육사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의 시에 공통적으로 관철하고 있는 정조는 간절함과 그리움입니다.
저는 그들의 그 간절함과 애틋함이 배어있는 뜨거운 노래를 대면하고자 40년대 시인을 읽었습니다.
|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같은 세상에도 눈맑은, 가슴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서서 눈물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가고, 밤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넘어 골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 박두진, ‘청산도’ 중에서 |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시세계가 가장 잘 드러난 시입니다.
그의 그리움은 정갈하고 단아합니다. 시인은 ‘볼이 고운 나의 사람’에 사무쳐 있습니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사랑하는 이, 기독교에의 귀의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의 총합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시민광장 여러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포로입니다.
40년대 식민지의 암흑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많은 젊음들은 폭풍같은 열정으로 자신을 거침없이 내맡기다가 산화해 간 이가 많습니다. 그들 중 해방조국에 귀환한 이가 바로 광복군의 장준하 선생입니다. 그러나 그도 끝내 독재의 마수에 희생되고야 맙니다.
그런 세대중의 하나인 유진오 시인은 그러나 그 시어가 지극히 고와서 이렇게 사무침을 표현했지요.
“조국이여
이리 가까이
바뜻 다가오시라“
저는 여러분의 순결한 열정이, 그 사무침이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10여년 전에 소설집을 출간하면저 저는 작가 후기의 제목으로 ‘이기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아름답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 생각합니다.
타인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일이야말로 인간 본성인 이기심을 극복하고 아름다움에 이르는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언젠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어느 지면에서 일생에 가장 감동을 받은 일로 80년대 대학생들의 소위 ‘위장취업’ 현상을 말했습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80년대에는 누구도 그 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공장으로 들어가 스스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후에 쓴 수기를 보고 저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당시에는 선과 악의 대결이었던 것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정치게임으로 제도화되었습니다.
이번 총선 결과는 여러모로 어둡습니다.
진보적 가치는 이후로 오랫동안 거처할 공간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군사독재 시대에는 국민의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 진보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민주정부 10년간 이 ‘자유권’은 비약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한껏 자유를 누리는 국민들은 더 잘 살기를 희망합니다. 야속하지만 국민들은 그들에게 자유를 안겨주기 위해 헌신했던 집단을 망각해버렸습니다. 좋은 정치는 국민의 마음을 읽고 그 소망에 부응하는 패러다임과 정책으로 승부하는 것이겠지요. 유시민은 아마도 이 길을 꾸준히 모색할 것입니다.
이번에 다시 한번 체감했거니와, 돈도 조직도 없는 정치인 유시민의 오늘이 있게됨은 오로지 여러분의 힘일뿐입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책읽고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을 사람이 불운하게도 군사정권 시절에 젊음이 있었으니, 그 역시 시대의 포로입니다.
아침에 비를 맞으며 낙선인사를 하는 동생을 보니 그저 마음이 처연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뜨거운 마음을 생각하니 그저 고맙고 송구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고마운 여러분.
그러나 우리 앞에 버티어 선 벽은 높고 강고합니다. 우리가 과연 50년 묵은 저 철벽을 녹여낼 수 있을지요?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우울하고 슬픕니다. 산그리메처럼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피어날 때 그토록 우아하던 목련이 참혹하게 일그러져 툭툭 낙하하는 밤에 여러분에게 편지라도 써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두서없는 글을 띄웁니다.
이번 선거기간에 보여주신 여러분의 사랑을 마음에 오래도록 새기겠습니다. 마음이 어둡고 쓸쓸해질 때마다 등불처럼 밝히는데 쓰겠습니다. 모두 부디 건강하시고 아름답게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앞으로 자주 글 올리겠습니다.
4월 11일
목련지는 밤에
유 시 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