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하고나서 시간이 많이 남아서, 오랜만에 모래시계를 봤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마 모래시계 방영 당시에 지방이었던 우리집에는 SBS가 나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중에 케이블에서 잠깐잠깐 본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이정재와 죽도 밖에 기억에 남지 않았다.
얼마전 종영한 태왕사신기의 김종학감독이 연출하였고, 고현정, 이정재 등을 스타로 만들었으며, 방영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기록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사실과 386세대를 모래시계 세대로 부른다는 것, 뭐 이정도가 내가 아는 모래시계에 관한 사실들이었다.
드라마를 보고 난 이후 느낀 것은 이 드라마는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고작 24부작, 러닝타임으로 따지면 고작 스물네시간이라는 시간에 20여년을 아우르는 방대한 스토리가 녹아들어 있다.
단순하게만 따지고 보면 카지노를 둘러싼 권력형비리 문제와 조직폭력배들간의 암투, 또 그와 연관된 세명의 주인공의 가슴아픈 사랑과 우정을 다룬 이야기지만, 정의와 상식이 무시되고 불의가 횡행하던 그 시대의 아픔을 세 주인공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드러낸 수작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가장 어두우면서도 찬란했던 순간으로 생각하는 1980년대에서 그 어느 젊은이들, 즉 386 세대 혹은 모래시계 세대들, 의 이야기가 극적이고 가슴아프지 않겠냐만은 이 드라마는 그것을 정말 완벽이란 말이 어울리게 표현해낸다.
김종학-송지나 콤비로 불리우는 팀의 능력을 태왕사신기를 보고서는 별로라고 생각했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하게 주인공인 세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 그 안에 담겨있는 슬픔과 고뇌만을 드러내는 것을 뛰어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엑스트라들의 대사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도 잘 살펴보면 그 시대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릎을 치고 가슴 아파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캐릭터 설정과 연출력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빨치산 경력이 문제가 되어 자신이 원하던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그런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자 뒷골목으로 들어가 조직의 일원이 된 태수(최민수), 구시대적인(어찌보면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당연했던) 사고를 가지고 자식을 가르치는 힘없는 농사꾼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법관을 꿈꾸며 법대에 진학한 우석(박상원), 온갖 비리가 만연해있는 카지노업계의 대부의 딸로 태어났음에도 시대의 불의를 참지 못하고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혜린(고현정)...
이 세 젊은이의 캐릭터의 설정이 어찌보면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시대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모두 담기에 더없이 좋은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검사가 된 우석에게 사형을 구형받아 죽음을 맞이하는 태수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 이 드라마는 세 젊은이의 가슴아픈 사랑과 우정, 그것을 통해 그 시대가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암울한 시기였음을 보여줬다.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에서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라고 한 유시민의 표현처럼 정말이지 극도로 모순된 시대였다.
갑자기 모래시계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과연 모래시계를 보면서 그 시대의 아픔을 느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뒤떨어진 이념적논쟁이나 민주화논쟁에 빠져 현실파악 못하는 찌질이들이나 하는짓이냐 하는 것이다.
요즘 칼럼이나 TV토론 등을 보면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볼때 보통 건국시대, 산업화시대, 민주화시대로 나누어 보고 이제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 왔다고들 한다. '경제'를 내세운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이 보여주는 것은 국민들이 원하는 새로운 시대가 바로 '선진 경제 시대'쯤으로 명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면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다. 각 시대의 국가 아젠다가 저 정도로 표현되면 딱 적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후대의 학생들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분노와 슬픔의 눈물을 흘려야만 하게끔 만들었던 수구 기득권세력의 자기방어 논리일 뿐이다. 이승만시대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해야했기 때문에, 박정희-전두환 시대는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자기들은 시대정신에 맞는 행동을 했을 뿐이며 자신들의 저지른 행위들은 정당한 것이었다는 전혀 근거없는 주장을 위한 비겁한 변명이다.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로 시대정신을 정의하는 것은 바로 한나라당의 논리인데 산업화, 선진화로 이야기 되는 경제논리는 시대정신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동양의 역사건, 서양의 역사건 어느 역사를 보아도 경제문제는 국가운영에 있어서, 심지어는 국가라는 실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항상 인간의 역사의 핵심이 되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것을 시대정신이라고 가져다 붙히는 것은 앞서 말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변명이며, 자신들이 경제에 관해선 전문가라는 인식을 심기위해 이용한 고도의 전략일 뿐이다.
한나라당이 시대정신을 이야기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민주화 시대에는 경제가 그렇게 우선시되는 개념이 아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 경제가 이모양 이꼴이다라는 것이다.
진보-보수 이념논쟁에 빠져서 민생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하지만 참여정부 5년을 돌이켜보면 도대체 이념논쟁을 누가 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이념논쟁에 불을 붙힌 것은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정부를 좌파로 몰아붙히는 정신분열에 걸린 한나라당과 매일같이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던 수구언론, 그리고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를 같은 편이라고 착각같지도 않은 착각했다가 우향우했다고 매일같이 투덜거리던 민노당과 또 역시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던 진보언론들 아닌가? 이들이 바로 이념논쟁의 가장 큰 책임자 아닌가? 그런데 참여정부가 다 뒤집어 쓴다.
여기서도 발동하는 "이것이 다 노무현 때문이다". 양극화, 부동산에 이어 이젠 이념논쟁까지 전부 다 노무현 때문이란다. 잘 되면 내탓, 안 되면 노무현 탓이라고 속담을 바꿔도 될 것 같다.
여튼, 이렇게 사실관계가 뻔한데도, 요새 언론을 보면 마치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이 경제문제를 내팽개치고, 이념 논쟁만 일삼은 무능력한 좌파인 참여정부의 인과응보요, 자업자득이라고 떠드는 판국이다. 얼마 전에 택시기사 아저씨도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민주화하느라고 나라경제가 이모양 이꼴 되었다고... 박통, 전통때가 좋았단다. 그래도 갱제는 살리지 않았냐고.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아마도 박통, 전통 때 그 택시에 탔던 사람이 내가 아니라 안기부 직원이었으면, 그 아저씨는 평생 브레이크를 밟지 못할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를일인데 말이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역사과목과 경제학을 유치원때부터 고등학교까지 필수과목으로 만들고 말리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아직 몇십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참 좋아하지만 참여정부 5년이 항상 옳았고 항상 정직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인간 노무현에게 기대했던만큼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렇다고 그 전의 꼴"통"들보다 못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한발 양보해서, 그냥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저 '시대정신'논리가 맞다고 치고 한번 생각해보자. 건국시대를 지나 산업화시대, 구조적 모순투성이의 산업화라고 하더라도 일단 산업화는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민주화시대란다. 많은 사람들이 제도적 민주화는 이루었다고 말한다.
직선제 개헌부터 시작해서 많은 부분 제도적 민주화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정형근을 아무리 까도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한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봐도 어느정도의 민주화를 이룩한 것은 확실하다. 그 다음이 문제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제목이 왜 모래시계인가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지만, 드라마를 보면 혜린의 아버지로 나오는 카지노업계의 대부 윤회장이 권력에 의하여 '팽'당하고 난 후에 모래시계를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한 쪽 모래가 다 떨어지면 끝이 나는 것이 우리 사는 것 같지 않나?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끝이 있는 법이지'.
그렇다면 지금 대한민국의 모래시계는 멈췄는가? 민주화를 향한 87년의 열정은 끝이 난 것인가? 그만큼 우리의 사회는 민주화를 이룩하였는가? 민주화의 모래가 다 떨어져 이젠 선진경제로 나아가기 위해 모래시계를 거꾸로 돌려야 하나?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이명박의 당선이 그것을 보여준다. 온갖 위법, 탈법 행위를 저지르고 그것에 대해서 거짓말과 모르쇠로 일관함에도 불구하고 과반에 가까운 지지에 당선된 그의 모습은 민주화의 모래가 아직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새로운 시간을 추구하는 우리의 성급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분명 대통합 민주신당, 민노당이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패배한 것은 맞다.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손학규나 심상정이 아닌 당내 세력이 앞섰던 정동영과 권영길을 후보로 선출함으로써 사람들이 말하는 '낡은 진보'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바로 이 두 정당이다.
이러한 후보선출과정의 구태적인 모습뿐 아니라, 선거 전략을 비롯한 모든 부분에서 한나라당이 탁월했고, 대통합 민주신당이 못한 것이 자명한 사실이고, 이것이 선거결과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결과론적으로 경제문제를 선점하고 말 못하는 이명박 후보를 오히려 말만 잘하는 정치인과 대치시키면서 추진력 있고 일 잘하는 후보로 만들어버린 한나라당의 전략, 민주개혁세력을 민주화와 이념논쟁에 심취해 민생을 내팽개친 좌파세력으로 몰아붙히며 이명박을 영웅적 해결사로 포장한 한나라당의 전략에 비해 민주개혁세력은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결과가 이렇게 나왔다고 해서, 민주화 시대는 끝났는데 한나라당은 그러한 시대정신을 잘 파악한 똑똑한 정당이고, 대통합민주신당은 시대정신을 간파하지 못한 얼간이들이라고 하면서 민주화의 가치마저도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의 전략이 뛰어났고, 그에 국민들이 혹한 것일 뿐 선거결과가 곧 시대정신이라고 오바하지 말라는 것이다. 과반의 지지를 보낸 국민의 선택은 탁월하고 현명했다면서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이면서 다시 자신들의 따뜻했던 과거로의 회귀는 절대 하지말기를 부탁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말하는 '이념'보다 앞선다는 '실용'이라는 말이 현실타협적이고 기회주의적이고 싶은 자신들의 더러운 욕망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말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ㅡ_ ㅡ ㅗ